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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데올로기 中에서)

칼 맑스

작성   : 1845년 가을~1846년 중반
출처   :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p211 ~215

           독일이데올로기 中에서 

출판사: 박종철출판사, 1991
번역   : 최인호 번역

             이와 더불어 원래는 성행위에 있어서의 분업에 지나지 않았던 분업이, 그 다음에는 자연적 소질(예컨대 체력), 욕구들, 우연들 등등 등등에 의해서 저절로 또는 '자연 성장적으로' 형성된 분업이 발전한다. 분업은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분할이 등장하는 시점으로부터 비로소 진정으로 분업이 된다.[1] 이 시점부터 의식은, 현실적인 어떤 것을 눈앞에 놓지(vorzustellen) 않고서도, 현실적으로 어떤 것을 표상한다고(vorzustellen), 자기를 현존하는 실천의 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현실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이 시점부터 의식은 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으며, '순수한' 이론, 신학, 철학, 도덕 등등의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론, 신학, 철학, 도덕 등등이 현존하는 관계들과 무순에 처하게 된다 할지라도, 이는 오직 그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들이 현존하는 생산력과 모순에 처하는 것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그뿐 아니라, 이는[모순에 처하게 되는 일은] 모순이 국민적 영역 내부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국민적 의식과 다른 국민들의 실천 사이에서, 즉 (지금 독일에서와 같이) 한 국민의 국민적 의식과 보편적 의식 사이에서 생켜난다는 사정에 의해서도, 관계들의 특정한 국민적 영역에서 발생할 수 있다.[2]─그렇지만 이러한 모순은 겉보기에는 한갓 그 국민적 의식 내부의 모순으로서 현상하는 까닭에 이 국민에게는 투쟁도 또한 이 국민적 오물에만 한정된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바로 이 국민이 즉·대자적으로 오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식이 저 혼자 착수한 어떤 일이라는 것은 모조리 헛짓이다. 정신 활동과 육체 활동, 향유와 노동, 생산과 소비가 상이한 개인들에게 귀속될 가능성 및 그 현실성까지 분업과 함께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계기, 즉 생산력, 사회적 상태 및 의식이 서로서로 모순에 빠질 수 있으며 모순에 빠질 뿐이라는 결론, 그리고 이들 세 가지 계기가 모순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은 오직 분업이 다시금 지양되는 것에만 놓여져 있다는 하나의 결론을 우리는 이 쓰레기더미 전체로부터 얻는다. 이 밖에도 자명한 것은, '유령', '유대의 끈들', '보다 차원이 높은 존재', '개념', '심사 숙고' 등은 단지 관념적이고 사변적이며 정신적인 표현, 한갓 개체화된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일 따름이며, 또한 생활의 생산 양식과 이와 관련된 교류 형태가 그 내부에서 운동하고 있는 바의 지극히 경험적인 질곡들과 제한들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내부에서 이런 모든 모순들이 주어져 있는, 그리고 그 자신의 측면에서 보자면 다시금 가족 내부의 자연 성장적 분업과 서로 대립하는 개별 가족들로의 사회의 분화에 근거하는 이 분업과 동시에 분배(Verteilung), 그것도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불균등한 노동 및 노동 생산물의 분배가 주어지며, 부인과 아이들이 남편의 노예인 가족 안에 이미 그 맹아, 자신의 최초의 형태를 갖고 잇는 소유도 주어진다. 아직 단지 매우 조야하고 잠재적인 가족 내부의 노예제는 최초의 소유인바, 게다가 이 소유는 이 단계에서 타인의 노동력에 대한 처분을 의미하는 현대 경제학의 정의와 이미 완전히 일치한다. 더욱이 분업과 사적 소유는 동일한 표현이다─전자에서는, 후자에서 활동의 생산물과 관련하여 말해진 것과 동일한 것이 그 활동과 관련하여 말해진다.

             나아가 분업과 더불어, 서로 교류하고 있는 모든 개인들의 공동 이해와 각 개인 또는 한 가족의 이해 사이의 모순이 주어진다; 더군다나 이 공동 이해라는 것은 그저 단순히 관념 속에 '보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현실 속에서, 노동을 분담하고 있는 개개인들의 상호 의존성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바로 특수 이해와 공동 이해 사이의 이러한 모순으로 말미암아 공동 이해는 현실의 개인 및 전체 이해에서 분리된 채 국가로서, 그리고 동시에 환상적 공동[체]성으로서 독자적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이 공동 이해가 독자적 형태를 취하는 것은 항상 혈연, 언어, 비교적 큰 규모의 분업 및 그 밖의 이해─그리고 특히, 우리가 뒤에서 전개할 것과 같이, 이미 분업에 의해서 조건지어져 있으며, 각각의 그와 같은 인간 집단 속에서 자기 분화하며, 그것들 중에서 하나가 다른 모두를 지배하는 바의 계급들의 이해─와 같은, 모든 가족 집단 및 종족 집단 속에 존재하는 끈들(Bänder)의 실제적 기초 위에서이다. 이로부터, 국가 내부에서의 모든 투쟁들, 민주제, 귀족제, 군주제 사이의 투쟁, 선거권을 쟁취하려는 투쟁 등등 등등은 상이한 계급들간의 현실적 투쟁들이 수행되는 환상적인 형태들─일반적으로, 보편적인 것은 공동적인 것의 환상적 형태에 불과하다─에 지나지 않는다(이 점에 관해 독일의 이론가들은, [독불 연보]와 [신성 가족]에서 이와 관한 안내를 충분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 그리고 나아가, 지배를 추구하는 모든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처럼 비록 그들의 지배가 모든 낡은 사회 형태 전체와 지배 일반의 폐지의 조건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 계급의 이해를 다시 보편적인 것 - 정치적 지배를 추구하는 모든 계급은 최초의 순간에는 이것을 지향해야 한다 - 으로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은 단지 자신의 특수한 이해만을 추구하는 까닭에─즉 이들 개개인에게 있어서 그들의 공동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 이해를 추구하는 까닭에─공동 이해는 그들에게 '낯선', 그들로부터 '독립된', 그래서 그 자체 다시 특수하고 특유한 '보편' 이해로 간주된다. 또는 그렇기 때문에 그 개인들 자체는, 마치 민주주의에 있어서 그러한 것처럼, 이러한 분열 속에서 운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공동의 이해, 환상적인 공동의 이해에 지속적으로 현실적으로 대립하는 이들 특수 이해들의 실천적인 투쟁은 또한 국가로서의 환상적인 '보편'이해에 의한 실천적인 중재와 제어를 필요로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업은, 인간이 자연 성장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한, 따라서 특수 이해와 공동 이해간의 분열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활동이 자유 의지에 의해서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성장적으로 분할되어 있는 한, 인간 자신의 활동은 인간에 대해 대립하는 낯선 힘, 인간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인간을 굴복시키는 힘으로 전화한다는 사실에 대한 최초의 실례를 우리들에게 제공한다. 즉 노동이 배분되기 시작하자마자, 모든 개인들은 그들에게 강요되는,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특정한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게 된다; 그는 한 사람의 사냥꾼이거나 한 사람의 어부, 목동, 비판적 비판가일 뿐이며, 그가 생계 수단을 잃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반면에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잇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도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사회적 활동이 이렇게 고정되는 것,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고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고 우리의 계산을 수포로 만드는 사물적 힘으로 우리들 자신의 생산물이 이렇게 응결되는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주요 계기들 중의 하나이다. 사회적인 힘, 즉 분업 속에 조건지어진 다양한 개인들의 협업(Zusammenwirken)에 의해서 성립한 다기한 생산력은, 그 협업(Zusammenwirken) 자체가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 성장적인 것이기에, 이들 개인들에게 자신들의 단결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밖에 있는 하나의 낯선 힘으로 나타나는 바, 이 낯선 힘은 개인들이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이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모르는 힘, 따라서 그들이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는 힘, 반대로 이제 인간들의 의지와 행동으로부터 독립된, 곧 그 의지와 행동을 우선적으로 지휘하는 일련의 특유한 국면들과 발전 단계들을 경과하는 힘이다.

             이와 같은 '소외' - 철학자들이 이해할 만한 용어로 말하자면 - 는 당연히 오직 두 가지 실제적 전제하에서만 지양될 수 있다. 이 소외가 하나의 '견딜 수 없는' 힘으로 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항하여 인간이 혁명을 일으키는 그러한 힘으로 되기 위해서는, 이 소외가 완전한 '무산'로서의 인간 대중을 산출하되 이와 동시에 현존하는 부의 그리고 문명의 세계와 모순된 채로 산출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양 전제는 생산력의 거대한 상승─고도의 생산력 발전을 전제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생산력들의 이와 같은 발전(이와 동시에 이미, 인간의 지역적 현존재에 내포되어 현존하는 경험적 존재를 대신하여 세계사적으로 현존하는 경험적 존재가 주어지는데)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실적 전제인데, 왜냐하면 생산력의 발전 없이는 결여가 단지 궁핍만을 일반화할 뿐이고, 따라서 궁핍과 함께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이 다시 시작되지 않을 수 없으며 온갖 해묵은 오물이 다시 발생해야만 될 것이고 나아가 오직 생산력들의 보편적 발전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의 보편적 교류가 확립되며, 따라서 한편으로는 모든 민족들 속에 '무산자' 대중이라는 현상이 동시에 만들어지고(보편적 경쟁) 각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의 변혁에 의존하도록 되어 결국에는 세계사적인, 경험적으로 보편적인 개인들이 지역적 개인들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1. 공산주의는 단지 하나의 지역성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며, 2. 교류의 힘들 자체도 보편적인 힘들, 그리하여 견딜 수 없는 힘들로서 발전할 수 없을 것이고, 향토적·미신적인 '상황'에 머무르고 말 것이며, 그리고 3. 교류의 모든 확장이 지역적 공산주의를 폐지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경험적으로는 오직 주된 민족들의 '일거의' 또한 동시적인 행동으로서만 가능하며, 이는 생산력들의 보편적 발전 및 그와 결부된 세계적 교류를 전제로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wird]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1] 이데올로그들의 최초의 형태인 승려들이 이와 때를 같이한다. [맑스의 방주]

[2] 종교,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가진 독일인. [맑스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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