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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맑스
작성:
1844년 5월말/6월 초부터 8월 사이에 씌어짐
출처: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p71 ~85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중에서
출판사: 박종철출판사, 1991
번역: 최인호 번역
우리는
국민 경제학의 전제들로부터 출발하였다.
우리는 그 언어와 그 법칙들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사적 소유, 노동·자본·토지의
분리, 이와 마찬가지로 임금·자본의
이윤·지대의 분리, 그리고
또한 분업, 경쟁, 교환가치
개념 등등을 가정하였다. 국민 경제학
자체로부터, 그 고유의 단어들로 우리가
지적한 것들은, 노동자가 상품으로 그것도
가장 비참한 상품으로 전락한다는 것, 노동자의
빈곤은 그의 생산의 힘과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것, 경쟁의
필연적 결과는 소수의 수중으로의 자본의 축적, 따라서
독점의 보다 가공스러운 재현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경작자와 제조업 노동자 사이의 마찬가지로 자본가와 지대
생활자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고 사회 전체가 소유자들과
무소유의 노동자들이라는
두 계급들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이다.
국민
경제학은 사적 소유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국민 경제학은 우리에게 바로 이 사실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국민 경제학은 사적
소유가 현실속에서 경과하는 물질적
과정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공식들로 표현하는데 그리고
나면 그 공식들은 국민 경제학에게 법칙들로
간주된다. 국민 경제학은 이들 법칙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즉 국민 경제학은 법칙들이 어떻게 사적
소유의 본질로부터 유래하는지 밝히지 않는다. 국민
경제학은 우리들에게 노동과 자본, 자본과
토지 사이의 분리의 근거에 대해서 어떠한 해명도 해 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국민 경제학이 자본의
이윤에 대한 임금의 관계를 규정할 때, 국민
경제학에게는 자본가들의 이해가 궁극적
근거로서 간주된다; 즉
국민 경제학은 자신이 개진해야할 것을
가정한다. 마찬가지로 경쟁 또한 도처에서
나타난다. 경쟁은 외적 사정들로부터
설명된다. 이러한 외적인, 겉보기에
우연적인 사정들이 어느 정도나 필연적 발전의 표현에
불과한지에 대해 국민 경제학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교환 자체가 국민
경제학에게는 어떻게 하나의 우연적 사살로 보이는가에
대해 우리는 살펴 보았다. 국민 경제학자가
움직이는 유일한 수레바퀴란 소유욕,
소유욕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전쟁, 경쟁이다.
국민
경제학은 운동의 연관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바,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경쟁에 관한
학설이 독점에 관한 학설에 대해, 영업의
자유에 관한 학설이 조합에 관한 학설에 대해, 토지
소유의 분할에 관한 학설이 대토지 소유에 관한 학설에 대해
다시 대립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는 경쟁, 영업의
자유, 토지 소유의 분할이 독점, 조합
및 봉건적 소유의 필연적인, 불가피한,
당연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단지 우연적인, 의도적인,
강제적인 결과로서 개진되고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사적 소유와,
소유욕과, 노동·자본·토지
소유의 분리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 교환과
경쟁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 절하의, 독점과
경쟁의, 기타 등등의, 이러한
소외 전체와 화폐
제도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을 개념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우리는
국민 경제학자가 설명을 하고자 할 때 그러는 것처럼 하나의
가공의 원시 상태에 우리를 위치짓지 않기로 하자.
그러한 원시 상태는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국민 경제학자는 단지 문제를
회색빛의, 안개가 낀 먼 곳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국민 경제학자는 그가 연역해야 할
것을, 즉 두 가지 것들 사이의, 예를
들면 분업과 교환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를 사태, 사건이라는
형식으로 가정한다. 신학자도 그처럼
타락을 통해 악의 기원을 설명한다. 즉
그가 해명해야 할 것을 하나의 사실로서, 역사라는
형식으로 가정한다.
우리는
하나의 국민 경제학적인, 현재의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노동자는
부富를 보다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그의 생산이 힘과 범위에 있어 더욱 증대되면
될수록, 더욱더 가난해진다. 노동자는
상품을 보다 많이 창조하면 창조할수록 더욱더 값싼
상품으로 된다. 사물 세계의 가치
증식에 인간
세계의 가치
절하가
정비례한다. 노동은 단지 상품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노동자를
하나의 상품으로서,
게다가 그것이 일반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것과 비례하여 생산한다.
이
사실은 다음의 것을 표현할 따름이다:
노동이 생산하는 대상, 즉
노동의 생산물이 하나의 낯선 존재로서, 생산자로부터
하나의 독립적인
힘으로서
노동과 대립한다는 것.
노동의 생산물은 하나의 대상 속에 고정된,
사물화된 노동인바, 이는
노동의 대상화이다. 노동의 현실화는
노동의 대상화이다. 노동의
이러한 현실화는 국민 경제학적 상태에서는 노동자의 탈현실화로서,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서, 전유는 소외로서, 외화로서
나타난다.
노동의
현실화는 너무나 심하게 탈현실화로 나타나서,
노동자가 아사에 이르고 말 정도로
탈현실화된다. 대상화는 너무나 심하게
대상의 상실로 나타나서, 노동자는 필 수
불가결한 생활 대상들뿐만 아니라 노동 대상들까지
상실하고 만다. 실로 노동 자체는 노동자가
오로지 최대의 노력과 극도의 불규칙적인 중단으로써만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대상으로 된다. 대상의
전유는 너무나 심하게 소외로 나타나서, 노동자는
대상들을 보다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더욱더 적게 되며, 더욱더
그의 생산물의, 즉 자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가
낯선 대상으로서의 그의 노동의 생산물에
관계한다는 규정 속에 이러한 모든 귀결들이 놓여 있다.
이처럼 이러한 전제에 따른다면 다음의 것이
분명해진다: 노동자가 더 힘을 들여
노동하면 할수록, 그가 자신에게
대립되도록 창조한 낯선 대상적 세계는 더욱더 강력해지며,
그 자신, 즉 그의 내적 세계는
더욱더 가난해지며, 그에게 그 자신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은 더욱더 적어진다. 이는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신
속에 가져다 놓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가
자기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더욱더 적어지게 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대상 속으로
불어넣는다; 그러나 그 생명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게 구속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이 더 크면 클수록
노동자에게는 더욱더 대상이 없게 된다. 그의
노동의 생산물인 것이 그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생산물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그 자신은 더욱더
왜소해진다. 그의 생산물 속에서의
노동자의 외화가
지는 의미는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
하나의 외적
실존으로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로부터
독립되어, 그에게 낯설게 실존하며, 그에게
대립하는 자립적 힘으로 된다는 것, 즉
그가 대상에게 부여했던 생명이 그에게 적대적이고 낯설게
대립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대상화, 즉 노동자의 생산을, 그리고
그러한 생산 속에서 소외,
즉 대상의 상실,
즉 그의 생산물의 상실을 보다 상세히 고찰해
보기로 하자.
노동자는
자연 없이는, 감각적인
외적 세계
없이는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
자연은 노동자의 노동이 그에 의존하여
현실화되며,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생산하는
소재이다.
그러나
자연은, 노동은 자신을 실행할 대상들 없이는 생활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노동에 생활
수단을
제공하듯, 자연은 다른 한편으로 보다 좁은
의미에서의 생활
수단, 즉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 생존의 수단도 제공한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그의 노동을 통하여 외적 세계,
즉 감각적인 자연을 전유하면
할수록, 그는 이중의 측면에서 생활
수단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게 되는데,
첫째로는 감각적 외적 세계가 그의 노동에
속하는 대상, 그의 노동의 생활 수단이기를 점점 더 중지한다는 측면에서;
둘째는 그것이 직접적 의미에서의 생활 수단, 즉 노동자의 육체적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를 점점 더 중지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이러한 이중의 측면에서 그의 대상의 노예가
되는데, 첫째로
그가 노동의
대상을, 즉
노동을
얻는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둘째로 그가 생존
수단을
얻는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된다.
따라서 첫째로 그가 노동자로서, 둘째로
육체적 주체로서
생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된다.
이러한 노예 상태의 요점은, 그가
노동자로서만 자신을 육체적 주체로서
유지할 수 있으며[kann],
육체적
주체로서만
노동자라는 것이다.
(자신의 대상 속에서의 노동자의 소외는
국민 경제학적 법칙들에 따르면 다음의 것들로 표현된다.
즉 노동자가 더 많이 창조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적게 소비해야만 한다는 것, 그가
더 많이 가치를 생산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무가치해지고
더욱더 값어치 없게 된다는 것, 그의
생산물이 더 정형화되면 될수록 노동자는 더욱더
기형화된다는 것, 그의 대상이 더
문명화될수록 그는 더욱더 야만화된다는 것, 노동이
더 강력해질수록 노동자는 더욱더 무력해진다는 것, 노동이
더 똑똑해질수록 노동자는 더욱더 어리석어지고 자연의
노예로 된다는 것으로.)
국민
경제학은
노동자(노동)와 생산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
틀림없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서는 기적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궁핍을
생산한다. 그것은 궁전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움막집을 생산한다. 그것은
미美를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불구를 생산한다.
그것은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지만 노동자의
일부를 아만적인 노동으로 되던지며, 또
다른 일부를 기계로 만든다. 그것은 정신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정식
박약과 백치병을 생산한다.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의 직접적 관계는 자신의 생산의 대상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이다.
생산의 대상에 대한, 그리고
생산 자체에 대한 자산가의 관계는 이러한 첫번째 관계의 귀결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을 확증한다. 우리는
이러한 또 다른 측면을 이후에 고찰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다음과 같이 묻는다면, 그것은
곧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에 관해 묻는 것이다:
노동의 본질적인 관계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자의 소외, 외화를 하나의 측면, 즉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만 고찰해 왔다. 그러나 소외는 생산의 결과에서 뿐만 아니라,
생산의
행위에서도, 즉 생산 활동 자체 내부에서도 나타난다.
만약 노동자가 생산 행위 자체 속에서
자기로부터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의 활동의 생산물과 낯설게 대립할 수 있게 되겠는가?
생산물은 확실히 활동의, 생산의
요약일 뿐이다. 따라서 노동의 생산물이
외화라면 생산 자체는 활동적 외화, 활동의
외화, 외화의 활동이지 않을 수 없다. 노동
대상의 소외 속에는 단지 노동 활동 자체 속에서의 소외,
외화가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노동의 외화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며, 즉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과 함계
있다고 느끼며, 노동 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 그의
노동은 그러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강제
노동이다. 그 노동은 그러므로 어떤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그의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의
노동의 낯설음은, 어떠한 육체적 혹은
기타의 강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노동이 마치
페스트처럼 기피된다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외적
노동, 즉 그 속에서 인간이 외화되는
노동은 자기 희생의 노동, 고행의 노동이다.
끝으로 노동자에 대한 노동의 외적 성격은
노동이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의 것이라는 것,
노동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 노동자가
노동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종교에서
인간의 환상, 인간의 두뇌, 인간의
심장의 자기 활동이 개인으로부터 독립되어, 즉
신적인 혹은 악마적인 낯선 활동으로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노동자의 활동은 그의 자기
활동이 아니다.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 속하며, 그 자신의 상실이다.
그러므로
인간(노동자)은 그의
동물적인 기능들, 즉 먹는 일, 마시는
일, 생식하는 일 등에서만, 기껏해야
그의 거주와 의복 등등에서만 가까스로 자신이 자유롭게
활동한다고 느끼고, 그의 인간적인
가능들에서는 기껏해야 동물로서의 자신을 느낀다는 결론이
나온다.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된다.
먹는
일, 마시는 일, 생식하는 일
등등은 물론 인간적인 기능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인간적 활동의 여타 영역으로부터 분리하여
최종적이고도 유일한 궁극 목표로 만들어 버리는 추상
속에서는, 그러한 일들은 동물적인 것이다.
우리는
실천적·인간적 활동의 소외의 행위,
즉 노동 d[ie] Arbeit을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1. 낯선
대상으로서의, 그리고 노동자를 지배하는
강력한 대상으로서의 노동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동시에 이 관계는 감각적 외적 세계에
대한, 즉 낯설고 그에게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세계로서의 자연 대상들에 대한 관계이다. 2. 노동 내부에서의, 생산
행위에 대한
노동의 관계. 이
관계는 낯설고 그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자
고유의 활동, 고통으로서의 활동, 무력無力으로서의
힘, 거세로서의 생식, 그
자신에 반항하고, 그로부터 독립적이고,
그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와 그 개인의 생명─생명이란 활동
이외의 어떤 것 [anderes]도
아니기 때문이다─등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이다. 앞서의 것이 사물의
소외였듯이, 이것은 자기 소외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두 가지 규정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의 제 3의 규정을 이끌어내야 한다.
인간은
하나의 유類적 존재인바, 이는 그가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유類를, 다른 사물의 유類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유類도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또한─그리고
이것은 동일한 사태의 다른 표현이지만─그가
현재의, 살아 있는 유類로서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동물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도 유적 활동은
육체적으로는 첫째로 인간이 (동물과
마찬가지로) 비유기적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von der unorganischen Natur lebt)는 점에
그 본질을 두고 있는바, 인간은 동물보다
더 보편적이며, 그가 그것에 의해 생활하는
비유기적 자연의 범위도 동물보다 더 보편적이다. 식물,
동물, 광석, 공기,
빛 등등은 이론적으로는, 부분적으로
자연 과학의 대상으로서, 부분적으로는
예술의 대상으로서 인간 의식의 한 부분을 이루듯이─인간이
향유하고 소화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준비해 두어야 하는
인간의 정신적·비유기적 자연, 정신적
생활 수단─, 그것들은 실천적으로도 인간
생활과 인간 활동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자연 생산물들이 식료품, 난방, 의복,
주거 등등의 어느 형식으로 나타나든 간에,
인간이 육체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은 오직
이러한 자연 생산물들에 의해서이다. 자연
전체가 1. 직접적 생활 수단인 한에 있어서,
2. 자연 전체가 인간의 생활 활동의 대상·재료
및 도구인 한에 있어서 자연 전체를 자신의 비유기적 신체로 만드는 바로 그러한 보편성 속에서 인간의
보편성은 나타난다.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다. 요컨대
자연이 인간 신체 자체가 아닌 한에서 그렇다. 인간이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지속적인 [교호]
과정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에서서 1. 자연을 소외시키고, 2. 그
자신을, 즉 그의 고유한 능동적 기능, 그의
생활 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유類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유적
생활을
개인적 생활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첫째로 소외된 노동은 유적 생활과 개인적
생활를 소외시키고, 둘째로 추상 속에 있는
후자를, 마찬가지로 추상된, 소외된
형식 속에 있는 전자의 목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왜나하면, 첫째 인간에게 노동, 생활
활동, 생산적 생활
자체가 어떤 욕구의, 즉
육체적 실존을 유지하려는 욕구의 충족을 위한 한
수단으로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적 생활은 유적 생활이다. 그것은
생활을 산출하는 생활이다. 생활 활동의
방식 속에 어떤 종種의 성격 전체, 그 종의
유적 성격이 놓여 있으며,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이 인간의 유적 성격이다. 생활 자체는
오직 생활 수단으로서만 나타난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과 직접적으로 하나이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은 의식적 생활 활동을 가진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융합되는 규정성이란
없다. 의식적 생활 활동은 인간을 동물적
생활 활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구별짓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인 것이다. 혹은
인간이 바로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적 존재이며,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생활이 그에게 있어 대상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인 것이다.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시켜서 급기야 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 자신의 본질을
단순히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는 바로 인간이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적 세계의 실천적 산출, 비유기적
자연의 가공은
인간이 의식적인 유적 존재라는 것,
즉 유類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처럼 태도를 취하는 존재라는 것, 혹은
자신에 대해서 유적 존재에 대해서처럼 태도를 취하는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동물도
생산하기는 한다. 꿀벌, 비버,
개미 등등처럼 동물은 둥지, 주거를
짓는다. 그렇지만 동물은 가기나 자신의
새끼들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만을 생산한다; 동물은
일면적으로 생산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동물은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하에서만 생산하지만, 반면에
인간 자신은 육체적 육구로부터 자유로이 생산하며, 그러한
욕구로부터의 자유 속에서만 비로소 진정으로 생산한다;
동물은 자신 자신만을 생산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자연 전체를 재생산한다; 동물의
생산물은 직접적으로 그 동물의 육체에 구속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자유로이 자신의 생산물에 대립한다. 동물은
자신이 속해 있는 종의 척도와 욕구에 따라서만 꼴을
만들지만(formiert), 반면에 인간은 모든 종의
척도에 따라서 생산할 줄 알고, 언제
어디서건 대상에 내재적 척도를 갖다 댈 줄 안다; 그러므로
인간은 또한 미美의 법칙들에 의거해서 꼴을 만든다.
이처럼
인간은 다름아닌 대상적 세계의 가공 속에서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신을 유적
존재로서
증명한다. 이 생산은 그의 활동적인 유적 생활이다.
이 생산에 의하여 자연은 인간의
작품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현실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 생활의
대상화이다; 그 까닭은 인간이 의식에 있어서처럼
지적으로뿐만 아니라 활동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자신을
이중화하고, 따라서 자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그의 생산의 대상을
빼앗음으로써 그의 유적 생활, 즉 그의 현실적인 유적 대상성을 빼앗고,
동물에 대한 그의 장점을 단점으로 변화시켜
그의 비유기적 몸, 즉 자연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소외된 노동은 자기 활동,
자유로운 활동을 수단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 생활을 그의 육체적 실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유에 대해 갖고 있는 의식은 소외로 인해,
유적 생활(Gattungsl[eben])이
인간에게 수단으로 되는 쪽으로 바뀌어 버린다.
소외된
노동은 따라서:
3. 인간의 유적 본질을,
인간의 정신적인 유적 능력뿐만 아니라 자연도
그에게 낯선 본질로, 인간의 개인적 실존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그 자신의 몸도,
그의 바깥의 자연도, 그의
정신적 본질, 그의 인간적 본질도
소외시킨다.
4.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활 활동, 자신의 유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의 하나의 직접적 귀결은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대립할 때에는,
그는 다른 인간과 대립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있어 유효한 것은 다른 인간,
다른 인간의 노동 및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요컨대, 인간이 자신의 유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문장은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그들 쌍방이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소외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그가 다른 인간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현실화되고 표현된다.
따라서
소외된 노동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모든 인간은,
그가 노동자로서 존재하는 바의 척도와 관계에
근거해서 다른 인간을 관찰한다.
우리는
노동자의, 그리고 그의 생산의 소외라는 하나의
국민 경제학적 사실로부터 출발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소외된,
외화된 노동.
우리는 이 개념을 분석하였고, 따라서
단지 하나의 국민 경제학적 사실을 분석했을 뿐이다.
이제
더 나아가 소외된, 외화된 노동이라는 개념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표명되고, 표현되지 않을 수
없는가를 살펴 보기로 하자.
노동의
생산물이 나에게 낯설게 존재하고,
나에게 낯선 힘으로서 대립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가?
나
자신의 활동이 나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의 낯선,
강요된 활동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가?
나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게.
이
존재는 누구인가?
신들일까? 물론 고대에는, 예를
들면 이집트, 인도, 멕시코에서의
사원 건축 등등과 같이 주요 생산이 신들에 대한 봉사로
나타날 뿐더러, 그 생산물은 신들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신들만이 노동의
주인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자연도
마찬가지로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노동에 의해서 자연을
자기에게 굴복시키면 시킬수록, 신들의
기적인 산업의 기적에 의해서 무용지물이 되면 될수록
인간이 이러한 힘들을 위해서 생산의 기쁨과 생산물의
향유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은 또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노동과
노동의 생산물이 그것에 귀속되는,
그것에 대한 봉사 속에 노동이 존재하는, 그것의
향유를 위하여 노동의 생산물이 존재하는 그러한 낯선
존재는 오직 인간 자신일 수만 있다.
노동의
생산물이 노동자에 속하지 않고,
하나의 낯선 힘이 그에게 대립하여 있다면,
이는 그 생산물이 노동자 이외의 다른 인간에게
속하는 것으로써만 가능하다.
그의 활동이 그에게 고통이라면 그것은 다른
인간에게는 향유이고, 다른 인간의 생활의 기쁨이지 않을 수
없다. 신들도 자연도 아닌 오직 인간
자신만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이 낯선 힘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다른
인간에 대한 그의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그에게 대상적,
현실적이다라는
상술의 문장을 상기하라.
따라서 그가 낯설고
적대적이고 강력한, 그로부터
독립적인 대상으로서의 그의 노동의 생산물, 그의
대상화된 노동과 관계할 때에, 그는 그에게
낯설고 적대적이고 강력한, 그로부터
독립적인 다른 인간이 이 대상의 주인이도록 대상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부자유한
활동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활동과 관계한다면, 그는
다른 인간에 대한 봉사 속에 있는, 다른
인간의 지배하에 있는, 다른 인간의 강제와
멍에 밑에 있는 활동으로서의 자기 활동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그리고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의 모든
자기 소외는 인간이 자신 및 자연에게 맺어 준 바의, 자기와
구별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종교적 자기 소외는 필연적으로 평신도의 사제에 대한 관계
속에서, 혹은 여기에서는 정신적 세계를
다루므로 중보자仲保者[1]등등에
대한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실천적, 현실적
세계속에서는 자기 소외는 다른 인간에 대한 실천적, 현실적
관계를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소외는
어떤 매개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이 매개는
그 자체 실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낯설고 그에게 적대적인 힘들로서의 생산의 대상과 행위에
대한 그의 관계만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또한 다른 인간이 그의 생산과 그의 생산물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도, 그리고 그가 이 다른 인간과
맺고 잇는 관계도 산출한다. 그가 그
자신의 생산을 자신의 탈현실화로, 자신의
형벌로 만드는 데 대응하여, 또 그가
자신의 생산물을 상실로,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생산물로 만드는 데 대응하여, 그는
생산 및 생산물에 대한 생산하지 않는 사람의 지배를
산출한다. 그가 자신의 활동을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데 대응하여, 그는
낯선 사람이 그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닌 활동을 전유하도록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관계를 노동자의 측면에서만 고찰해 왔는데,
이후에는 비노동자의 측면에서도 고찰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외된, 외화된
노동을
통해서 노동자는 노동에 낯설고,
노동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 노동에 대한
관계를 산출한다. 노동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는 자본가─그 밖에 어떤 다른
이름으로 노동의 주인들을 불러도 좋다면─의
노동에 대한 관계를 산출한다.
그러므로
사적 소유란 외화된
노동, 자연과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자의 외적인 관계의 생산물, 결과,
필연적 귀결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는 외화된
노동, 즉 외화된
인간, 소외된
노동, 소외된 생활, 소외된
인간의 개념으로부터 분석에 의해 생겨난다.
우리는
물론 외화된 노동(외화된
생활)의 개념을 사적 소유의 운동으로부터의
결과로서, 국민
경제학으로부터 획득하였다. 그렇지만 이
개념을 분석하면, 사적 소유가 외화된
노동의 근거, 원인으로 나타날 때에, 사적
소유란 오히려 외된 노동의 귀결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는데, 이것은 신들이 본래 인간 지성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관계가 뒤에 가서는 상호 작용으로
바뀐다.
사적
소유의 전개의 최후의 정점에서,
사적 소유의 이러한 비밀, 즉
첫째 사적 소유는 회화된 노동의 생산물이라는 사실, 둘째
사적 소유는 노동이 그것을 통해서 외화되는 바의 매개이며, 이러한
오화의 실현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다시 나타난다.
이러한
전개는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갖가지 충돌들에 즉각 빛을
던져 준다.
1. 국민 경제학은 생산의 본래의
영혼으로서의 노동에서 출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사적 소유에 모든
것을 주어 버린다. 프루동은 이
모순으로부터 노동을 위하고 사적 소유에는 반反하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겉보기의 모순이 소외된
노동의 자기
자신과의 모순이라는 사실과 국민 경제학은 다만 소외된
노동의 법칙들을 진술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또한 임금과
사적 소유는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의 생산물, 대상이
노동 자체에 급료를 지불할 경우, 임금은
노동의 소외의 필연적 귀결이기 때문이며, 임금에
있어서 노동은 자기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보수의
종복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나중에 상술할 것이고, 지금은
약간의 결론들만을 끌어낼 것이다.
따라서
임금의 강제적 인상(다른
모든 난점들은 도외시하더라도, [특히]
그것이 변칙으로서 강제적으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은 도외시하더라도)은 노예의
좀더 나은 보수밖에
안 될 것이고, 또한 노동자에게도 노동에게도 그것들의
인간적 사명과 존엄을 확보시켜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말이지, 프루동이 요구하는 것과 같은 급료의
평등조차도
자신의 노동에 대한 현재의 노동자의 관계를 노동에 대한
만인의 관계로 전환시킬 뿐이다.
그 경우 사회는 추상적 자본가로 파악된다.
임금은
소외된 노동의 직접적 결과이고,
소외된 노동은 사적 소유의 직접적 원인이다.
따라서 한 편이 붕괴하면 다른 편도 붕괴하지
않을 수 없다.
2. 더 나아가 사적 소유에 대한 소외된
노동의 관계로부터, 사적 소유
등등으로부터의, 노예제로부터의 사회의
해방은 노동자 해방이라는 정치적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러한 표현은 마치 노동자의
해방만이 중요한 것처럼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해방 속에 보편적 인간 해방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해방 속에
보편적 인간 해방이 들어 있는 이유는 인간의 노예제 전체가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노예제 관계가 이 관계의 변용들과
귀결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석에 의해서 소외된,
외화된 노동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사적 소유라는
개념을 찾아내었듯이, 이
양 요인들의 도움을 받아 모든 국민 경제학적 범주들이
설명될 수 있는데, 우리는 각각의 범주들, 예를
들어 흥정 거래, 경쟁, 자본,
화폐 등에서 이 최초의 기초들의 특정한 그리고
발전된 표현만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형상을 고찰하기에 앞서 아직 두
가지 과제들을 해결해야만 한다.
1. 소외된 노동의 결과로서 나타났던 사적
소유의
일반적 본질을,
참으로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소유에 대한 그것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것.
2. 우리는 노동의 소외, 노동의
외화를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이 사실을 분석하였다.
이제 우리는 물음을 던져 보겠는데, 인간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노동을 외화시키고
소외시키게 되는가? 이
소외는 인간의 발전의 본질 속에서 어떻게 근거지어지는가?
우리는 이미 사적 소유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인류의 발전 과정에 대한 외화된 노동의 관계에 관한 문제로 바꿔 놓음에
의해서 과제의 해결을 위한 많은 것을 획득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적 소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이
인간 바깥의 어떤 사물과 관계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인간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이 새로운 제기는 이미 그것의 해결을 내포하고 있다.
1. 사적 소유의
일반적 본질과 진정으로 인간적인 소유에 대한 그것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가
보기에 외화된 노동은 상호 조건짓는 혹은 한 가지 동일한
관계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인 두 개의 구성 요소들로
분해되었는바, 전유는
소외로서, 외화로서
나타나고, 외화는
전유로서,
소외는 진정한 시민권 취득으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한 측면을, 노동자
자신과 관련한 외화된
노동, 즉 외화된 노동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고찰하였다. 우리는 이 관계의 생산물로서, 필연적
결과로서 노동자와
노동에 대한
비노동자의
소유 관계를
알아내었다. 외화된 노동의 요약된 물질적
표현으로서의 사적
소유는 양
관계들, 즉 노동에
대한,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비노동자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와
노동자
및 노동자의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비노동자의
관계를 포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노동을 통해서 자연을 전유하는
노동자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전유는 소외로서, 또
자기 활동은 타인을 위한 활동, 타인의
활동으로서, 생명성은 삶의 희생으로서,
대상의 생산은 낯선 힘, 낯선
인간에로의 대상의 상실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찰했다면,
우리는 이제 노동과 노동자에게 낯선
이 인간이 노동자에 대하여,
노동에 대하여, 노동의 대상에
대하여 맺고 있는 관계를 고찰한다.
첫째로
노동자의 경우에 외화의,
소외의 활동으로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비노동자의 경우에는 외화의,
소외의 상태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둘째
생산 속에서의, 그리고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현실적,
실천적 태도(감정
상태로서의)가 그에게 대립하는
비노동자에게 있어서 이론적
태도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셋째, 노동자가 자기 자신에 반하여 행하는
일체의 것을 비노동자는 노동자에 반하여 행하지만, 비노동자가
노동자에 반하여 행하는 일체의 것을 비노동자는 자기
자신에 반하여 행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관계들을 자세히 고찰해 보기로 하자.[2]
[1] 개신교에서 ‘중보’란 인간에게는 그 죄를 사하여 주고 하느님에 대해서는 뭇사람의 죄를 홀로 지고 죽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중보자란 그리스도를 말한다.(역자)
[2] 여기서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제1노트의 초고는 끊겨져 있다.(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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