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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반노동선언 해제
작성: 최우성
작성일: 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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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反노동선언>을 번역소개한 후, 이 글의 배경이나 성격에 대해 간략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여러분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하에서는 대략적이나마 이 글에 대한 짧은 소개글을 덧붙입니다. 이 글을 소개한 이유는 올해 들어 발표된 이 글속에는 현재 독일을 포함하여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좌파진영" 내의 논쟁축을 이루는 여러 쟁점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에서였습니다. 이 글을 두고서 진행되는 다양한 논쟁글도 기회가 닿는대로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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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反노동선언>은 올해 여름 <KRISIS(위기)>란 이름의 맑스주의 연구집단이 발표한 팜플랫 형식의 공동저작문건이다. 이 글의 주요내용은 올해 봄-여름 사이에 <Jungle World>라는 좌파주간신문에 연재되었다. ( 정확한 출전 : Gruppe KRISIS, < Manifest gegen die Arbeit >,Leverkusen, 1999 )
이 글을 공동으로 집필한 <KRISIS> 그룹은 무엇보다도 <KRISIS>란 동일한 이름의 맑스주의 잡지를 통해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를 일컬어 "1848-1989년 사이의 시기를 지배했던 노동운동-맑스주의를 극복하려는 포스트맑스주의자"라고 소개하는 <KRISIS>그룹은 90년대 중반 이후의 독일 좌파운동진영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물론 이들의 문제의식이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지난 86년부터 발간된 <맑스주의적 비판>이라는 부정기 잡지를 통해서이다. 이 잡지의 이름은 90년부터 현재의 <KRISIS>로 변경되었으며, 현재 <KRISIS>는 22호까지 발간되었다.
<KRISIS>그룹의 문제의식은 그들이 발간하는 잡지 <KRISIS>에 "상품생산사회 비판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덧붙여진데서 잘 드러난다. 이들의 출발점은 맑스에 의해 언급된 "추상노동" 개념이다. 맑스는 역사상 모든 사회 구성체에서 행해지는 노동일반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하나의 특수한 형태를 띤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하여 "구체노동"과 "추상노동"이라는 개념을 구분한 바 있다. <KRISIS>그룹에 따르면 맑스의 비판가들은 물론이려니와 그 후예들 - 여기에는 노동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이루는 역사상 모든 이념들, 다시말해 사민주의에서 공산주의에 이르는 모든 조류들이 포함되어 있다 - 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갖는 이러한 특수성에 대해 그릇된 이해방식을 발전시켰다. 이들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은 "추상노동"을 "노동 일반", 다시 말해 역사상 모든 사회구성체에서 존재해온 초역사적인 개념으로 이해했으며, 여기에다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구체노동"을 대비시켰다. 이러한 이해방식은 오로지 노동의 외적 요소 ( 노동강도, 노동에 대한 대가, 노동시간 등 ) 만을 시야에 붙들어두었는데, 여기에서 바로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착취라는 문제의식, 다시 말해 직접생산자가 빼앗기는 생산물을 양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싹튼다고 <KRISIS> 는 비판한다. 맑스가 말하는 "추상노동"이란 이미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사회의 노동을 의미하며, "추상적"이라는 수식어 속에는 이미 개별 직접생산자의 "구체노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과정이 전제되어 있다는 게 <KRISIS> 그룹이 제시하는 논의의 출발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들의 문제의식속에는 80년대 이후에 발전된 "추상노동이론적 해석틀"이나 "가치형태분석" 등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맑스를 새롭게 읽어내려는" 80년대 이후의 몇몇 이론틀이 자본과 노동 사이에 놓인 근본적 적대 그 자체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 ( 다양한 조류의 "근본주의" )으로 이어진 데 반해, <KRISIS> 의 작업은 오히려 자본과 노동 사이에 놓인 "논리적 동일성"을 파헤쳐 냄으로써 자본주의 극복의 길을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데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들이 볼 때, 자본주의사회의 양대계급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은 이미 "자본주의적 계급"이며, 따라서 의식했건 아니건간에 이른바 노동의 논리속에는 이미 자본주의 메카니즘이 침투해 있다. 맑스 자신이 <그룬트리세>에서 발전시켰고, 훗날 <자본>의 일부에서 그 흔적을 남겨 놓았듯이,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곧 특정한 "상품소유자"로서 시장에서 만나며,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구조적 조건하에서 나타나는 행동양식들, 예컨대 지금껏 계급의식이라 불리웠던 것의 상당부분은 이미 상품생산사회의 기반위에서 가능한 (평등한)상품소유자들의 행동이다.
<KRISIS> 의 이론작업을 다른 여타의 맑스주의적 이론틀과 구분시켜주는 구체적인 계기는 결국 "계급"에 대한 이해에서 찾아질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종말은 곧 혁명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논문( <KRISIS>. No. 10 )에서 알 수 있듯이, <KRISIS>에게서 계급이란 상품생산체계 내에서의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지극히 "객관적 범주"이자 동시에 상품생산사회의 물신성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모습니다. 따라서 말하자면 (물신화한) 계급의식을 벗어던질 경우에만, 다시말해 상품생산사회의 구조적 강제에서 벗어날 경우에만 혁명은 시작될 수 있는 셈이다.
II.
다소 추상적인 논의로 비치는 <KRISIS> 의 이론작업은 사실 80년대 이후 "맑스를 새롭게 읽기" 혹은 "맑스를 다시 읽기"라는 모토 아래 등장한 일련의 흐름안에서 자리매김될 수 있다. 이들의 논의 역시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사회"가 위기 ( 혹은 소멸 )에 빠진 현실과 근본적으로 대면하려는 여러 급진적 "포스트" 흐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 사회"를 넘어선다는 의미는 80년대 이후의 현실을 뚫고나가려는 사회운동의 전망을 단순히 "더 많은 일자리"를 통해 "노동사회의 정상성"을 되살리는데서 찾는 게 아니라, 임노동관계 자체의 전화 ( 혹은 극복 )속에서 구하고자 한다는 걸 뜻한다.
큰 틀에서 보자면, 이런 흐름의 한편에는 임노동사회의 등장과 함께 그 경계선에서 나란히 존재했던 다양한 형태의 "(임)노동거부운동"이 자리잡는다. 요즘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는 라파르그의 논의나 20세기 초 다다이즘 역시 이런 문제의식에서 읽힐 수 있다. 만일 70년대 이후만을 놓고 보더라도,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 이후에 나타난 다양한 조류들은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예컨대 독일의 <Wildcat> 그룹이나 최근 등장한 <행복한 노동자> ( 이 두 그룹의 글은 조만간 번역소개하겠습니다! ) 그룹등은 "자본은 곧 고정된 양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가변자본"이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해 다양한 형태의 노동거부운동 ( = 계급투쟁 ) 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른바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 역시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투쟁에 대한 자본의 맞대응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70년대 아우토노미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논의속에서는 우선적으로 프롤레타리아와 노동자 계급 사이의 구분이 시도되고 있는데, 후자가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객관적 범주"라면, 전자는 직접생산대중이 객관적인 의미의 계급으로 환원되는 경향을 끊임없이 상쇄하는, 보다 주체적인 "욕망덩어리"인 셈이다. <Wil
-dcat>그룹이 <KRISIS> 그룹을 "레닌주의의 잔재"이자 "객관주의의 극단"이라고 일컬을 경우에는 레닌주의 = 경제주의 = 객관주의 라는 등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으며, (자본에 포섭된) 임노동을 넘어서는 삶의 욕망은 곧 이들 객관주의의 대립쌍으로 제시되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으로 <KRISIS> 의 문제의식은 임노동사회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노동사회의 위기를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이들 "주관주의적" 논의들과 한데 묶일 수 있지만, 이들 "주관주의적" 입장들이 욕망이라는 존재를 마치 초역사적인 범주로 절대화하려는 성향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맞선다. 욕망이나 계급의식, 계급이해라는 범주 역시 부르조아적 경제시스템, 곧 상품생산사회라는 구조적 조건 아래서 기능하는 (물신화한) 범주로 파악하는 <KRISIS>에게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주의극복의 불가능성"이라는 비관적 냄새마저 풍겨나온다. 이들이 레닌주의에 대해 언급할 경우, 그것은 곧 정치주의일 뿐이며, 따라서 앞서 언급된 또 다른 흐름들 역시 기껏해야 레닌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네오레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에게서는 레닌주의 = 주관주의 = 사회학주의에 맞서 경제주의(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의미
와는 전혀 다르지만) = 객관주의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KRISIS> 의 이론틀에서 제2인터내셔날에까지 소급되는 경제주의적 전통, 자동붕괴론적 성향을 읽어내려는 비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III.
새로운 전망아래서 노동사회의 위기 ( 혹은 전화 )에 접근하려는 이런 모든 흐름들이 구체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일까? 아마도 그 지점은 (임금)소득을 (생산적) 노동으로 환원시키는 자본주의의 절대 명제일 것이다. 만일 오늘날 만연한 대량실업이 더 이상 일시적이거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며, 자본주의 발전의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지는한, 생산 영역으로부터 튕겨나온 사람들, 다시말해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먹을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좌파진영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자, 곧 과제이다.
지금껏 지배적인 주류경제이론은 물론, 맑스주의 경제학은 개개인이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조건을 오로지 생산영역에서의 위치와 관련지워서 생각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따라서 소득을 노동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명제는 개개인의 물질적 조건을 생산영역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문제로 환원하는 게 아니라, 재생산이라는 보다 넓은 틀에서 접근한다는 말이며, 동시에 전통적인 의미의 맑스 이론의 틀을 벗어나야하는 필연성을 드러내준다. 자본주의가 이제 더 이상 좁은 의미의 생산양식이 아니라, "재생산양식"인 한에 있어서, 생산영역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게도 삶의 권리, 곧 "생존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80년대 이래 급진좌파적인 사회운동의 핵심명제이다. 문제는 일자리를 나눠갖는 게 아니라, 사회적 부를 나눠갖는 것인 셈이다. ( 말하자면 일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정상적인 임노동관계에 포섭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의 "노동", 예컨대 "사회운동이라는 노동"에 대해 국가가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을 통해 "임금"을 지급한다 --> 새로운 사회적 연대! ) 사회적 부를 나눠갖자는 운동은 나름의 역사를 지닌다. 예컨대 70년대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운동에서도 노동으로 분리된 소득을 주장하는 흐름이 있었고, 독일의 경험을 들자면 80년대 전개되었던 이른바 Jobber운동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법정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두 개 이상의 임시직에 동시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이들 Jobber에게서 자본주의적 임노동관계에 내포된 구조적 강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일련의 흐름들은 80년대중반 이후, 자본측으로부터 이른바 "유연화"라는 맞대응이 등장함으로써 실패한 것으로 이야기되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핵심을 차지했던게 바로 "모든 이들에게 1500마르크씩을!"이라는 주장이었다. 일을 하건 안하건, 일할 의사가 있건 아니건 간에 모든 이들에게 일정한 사회적 부를 나눠갖자는 주장은 현실적인 의미를 떠나, 노동과 소득의 일치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메카니즘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읽혔었다. 물론 이처럼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명시적인 전망을 담고 있지 않더라도, 최근들어서는 "새로운 빈곤"이란 조건 속에서 "노동권"에 대비되는 "생존권"이라는 개념이 계속 연구되고 있다. 또한 90년대 들어 네그리 등 일련의 이탈리아 이론가들에 의해 제시된 "비물질노동이론"에서도 "공산주의의 싹"을 이처럼 노동과 분리된 소득의 가능성에서 찾으려는 흐름이 나타난다.
물론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이처럼 노동과 소득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자유주의 성향의 현실개혁가들 자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지는 복지국가에서 보여지는 비효율(재정적자)과 관료제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회보장제도를 완전히 철폐 ( 예컨대 독일의 경우 105 가지 ) 하고, 대신 일정한 소득한계를 정해 그 이하의 소득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 ( 이른바 Negativ income system ) 함으로써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자유주의성향의 논지들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단일화시켜야 한다는 것...
이렇게 볼 때, 90년대 들어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라는 명제는 급진좌파운동의 새로운 화두이자, 곧 어쩔 수 없는 대세이기도 하다. 문제는 소득을 노동으로 환원시키는 전통적인 사회이론의 한계를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이런 흐름들이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다시 환원시켜 버리려는 자유주의적 대세에 어떻게 맞설 수 있느냐이다. <KRISIS>가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임노동관계를 뛰어넘는 전망, 곧 사람들이 임노동의 강제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전망을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만일 그같은 가능성이 단순히 "일자리 대신에 돈을 받는 것"으로 이해될 뿐이라면 자본주의 극복의 전망은 흐려진다는 게 이들 논의의 바탕에 깔린 문제의식이다. 이들에게서 화폐란 상품생산사회가 굴러가는 물신형태의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IV.
가치론과 공황론이라는 맑스주의 경제학의 핵심명제로부터 21세기를 맞는 현실 사회운동의 전략에 이르기까지 <KRISIS>의 논의속에서는 다소 추상적인 형태로나마 많은 쟁점들이 담겨 있다. 만일 앞서 얘기했듯이, "주관주의적" 성향과 "객관주의적" 성향이라는 대립구도만을 놓고 본다면 급진좌파적인 흐름들이 제시하는 현실적인 가능성이라는게 어찌보면 "욕망의 반란"이냐 "이성의 반란"의 문제로 비칠지도 모른다. 특히 <KRISIS> 의 경우, ( 흔히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급진적인 ) 초기 비판이론의 흔적을 여전히 짙게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논의가 제시하는 현실적인 전망이란게 단순히 "의식화"의 문제로 줄어들 위험성이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주의적이냐 객관주의적이냐라는 용어를 떠나 "제도"라는 다소 유행을 타는 말을 끄집어 들인다면, <KRISIS>의 논의나 그 반대편에 놓인 흐름들이나 결국 "표준화한 행동양식 = 제도"를 뛰어넘는 행위의 가능성을 어떻게 찾느냐의 문제로 읽힐 수 있다. 물론 문제는 이처럼 제도적 틀을 뛰어넘는 행위의 주체를 "선험적으로" 어떤 "집단"으로 환원하느냐, 아니면 다양한 계기 속에서 열린 채로 남겨두느냐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공장사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사회적 노동자"라는 개념을 제시하는 일련의 흐름들 ( 주관주의적 흐름들 ) 이 상대적으로 집단적인 ( 굳이 "계급"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 반란, 전복, 일탕행동 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KRISIS>의 경우에는 좀더 "탈"집단화한 계기들에 관심을 가진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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