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론”과 그
반대자들: 나혜석,
김일엽을 중심으로
(강연안)
1) “현모양처론”의 기원: 한국 근대 “여성 근대화론” 시초 – 자손 (일차적으로 男兒) 양육에 대한 배려
차원, 즉 여성을 산아의
도구로 규정한 것을 전제로
하는 차원 –
1890년대 재야 근대주의자 (<독립신문>)과 정부 사이의 차이 – 정부는 원칙상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급하지 않은 일로 치부하여
갑오경장 때 관립여학교
설립안을 부결시켰음. 1908년에 이르러서야
–
관립여학교령
공포 (“규례”는 이미 1899년에 만들어졌는데, 실효 없었음). 1909년
–
한성여학교
설립 (이미 통감부의
식민화 교육 기관의 성격이
강함) 이에 비해서 <독립신문>은
“근대적
남성 국민”을 만들기 위한
“여성
개화”의 필요성을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인식했음: “인구 중의 절반을
버렸는지라 어찌 아깝지
않으리오.
…
학부에서 여학교를
세우면 내버렸던 사람들이
쓸 사람이 될 것이오” (
1905-1910년간의 여성 교육론, 여성개화론 – 약 125개의
사립 여학교 중의 하나인
양규의숙의 취지서에서
나타나있듯이, “부덕을 가르쳐
현모양처의 자질을 완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음. 그 당시의 여성교과서 (<여자소학수신서>:
한국적
현모양처론의 몇 가지 기원
–
전통적 여성관에다가
개신교의
(주로 미국인) 선교사들의 빅토리안
시대의 보수적 여성관 – “남성은
경쟁의 지옥에서 국가와
가정을 보호하고, 여성은
sweet home의 천국에서
남성과 국가를 보조해주는
존재”.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부정적인
타자는 “음녀” – 선량한 주부와
대조되는 매춘부. 이 빅토리안 시대의 이중적/위선적 성 담론 (실제로는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중산층, 상류층 생활의 일부이었음)은 “주색 삼가해야 한다”는 유교적인
도덕론과 결합하여 한국의
초기 기독교 개화주의자들을
“매음녀
비판자”로 만들었음 –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과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원은 메이지
일본의 “양처현모론” (문중 본위주의, 남아 선호 사상이 훨씬
더 강력한 한국에서 “현모양처”로 전도됐음). 모리 아리노리 (森有례:
1885-1889 문부대신) – 후쿠자와 유키치와 마찬가지로
여자 교육을 국가 부흥, 부국강병의 조건으로
보고 “국민들의 좋은 부인과
어머니” 만들 여학교 창설에 적극적이었음 - 1872년의 학제는 여아소학을
심상 일반)소학과 철저하게
구별해놓았음. 1879년
교육령 42조 – 남녀 학교를 따로
두는 것을 상세히 법제화됐음. 여자학교 – 수업연한과 내용은
남자학교와 달랐음 (가사, 재봉시간 위주, 외국어는 선택과목). 여자의 일반대학교 입학
허용 - 1910년대 이후의 일. 러일 전쟁 이후로는 적어도
소학교 교육은 거의 모든
여아들에게 가능해졌지만
실제로는 양처현모, “가정부인”의 이상은
중산층 이상의 소수 가정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음 – 1919년 같으면 70만 명의 여공이나 거의 2-3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창기 (娼妓)들에게는
“단란한
가정”은 있을 수 없었음
–
그래서 양처현모의
이데올로기는 이들 “비정상적
여성” (여공, 창기, 유랑민 여성, 식민지의 극빈층의 여성
등)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담론으로 기능하기도 했음.
일제 시기의
“현모양처론” – 일본 쪽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고 토착 친일
부르주아들의 매체를 통해
확산, 토착화됨. <동아일보>,
2) “현모양처론”의
반대자들: 일본에서 1911년9월 히라츠카 아키코 (平塚明子: 1886-1971: 라이초:
雷鳥) 등 5 명의 발기인에 의한 세토샤 (青鞜社) 결사: 잡지 <세토> 발간 – 남에 의존하는
생활에 반대,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
“오랜
도덕과 법률의 파괴” 선언 – 그런데 “여성 독립”의 방법론에
대해 확실한 신념은 아직
없었음. 세토샤에 대한
박해, 잡지 발행 중단. 히라츠카의 <세토샤> 제1호 명언: “元始女性は
は太陽であった。 正の人であった”. 1919 – “신부인협회” 조직. 그
시대의 주류 담론의 영향: 히라츠카의 “우생학적” 신념과 결혼제한
운동. 우생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전복: 히라츠카가 남성을 주된
성병 (性病) 보유자, 즉 우생학적인 “부적자” (不適者)로 정의하여 “타락된
남성”에 의한 “민족의
쇠퇴”를 방지하고자 했음. 여성들의 정치적 운동: “부선획득동맹” (婦選獲得同盟
: 1924) – 결국 혁명적 노선과
개량주의적 노선이 갈라져
1927년에 분열됐음. 중산계급 여성들의 정치
운동의 아주 한정된 성과들: “치안경찰법”상 여성의
정당 가입은 계속 불가능해도
정치연설회 참가 및 주최
가능해졌음. “세토샤”의 진보적인
“반(反)현모양처론 운동”과 “입센” 열풍의 관계: 1911년 일본에서 입센의
“인형의
집”
첫 상연, 파격적인 인기 획득. 잡지 <세토> - 창간호부터
입센 관련 토론, “노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일본에서의 “아타라시이
온나” (신여성) 고충 피력. “세토샤”가 한국
여성 운동에 끼친 영향 – 3-1 운동으로 “개조”, “해방”의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에서 1920년에 김일엽 (1896-1971)의 집에서 “청답회” (青鞜會) 조직, 김활란, 박인덕,
나혜석 (1896-1948) 등 참석. 잡지 <신여자>
발간 (1920년3월). 창간사의
취지: 여자 교육의 목적이
“자각하는
사람이 되도록, 영혼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지 현모양처가
되든가 말든가 하는 것은
각성된 개체의 독립적인
판단에 맡겨져야 함” – 여성주의와
개인주의의 결합.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은
신여성과 가까운 남성 지식인에게마저도
그때로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신여자>의 편집고문 양건식 (1889-1944) – 창간호에서 “남성이
어떤 여자를 요구하는가”에 대해
“교육
받고, 신체 건강하고
뚱뚱하지 않고, 용모가
아름답고 애교 있는 여자” 운운 – 여성을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계속 인식했음. “신여성”에 대한
그 당시 남성 지식인의 일반적인
폄하적 시각의 일단 보여줌 (염상섭,
김동인, 이광수의 신여성 조롱).
“현모” 담론에 대한 도전: 나혜석의 “모 (母) 된 감상기” (<동명>, 1923년1월) – 사회가 보통 은폐하기를
요구하는 “살림꾼”, “어머니”의 고통
고백. 이와 함께 자신의
사회적 활동의 중단에 대한
고민, 자살 생각 등도
공개 – “여자라면 당연히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대해 과감히 도전했음: 나혜석에게는 “아이 낳기”란 “여자의
당연한 직분”보다는
하나의 시련. 여성을
타율화시키는 시집살이에
대한 부담감: “손님 접대, 친척에 대한 의리. 一言一動이 모두 남을
위해 살아야 할 소위 가정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는가? 소위 사랑을 꿈꾸었을지언정
쌀걱정, 나무걱정, 하인과의 싸움을 꿈꾸지
않았다”. 남성 위주의 사회가 늘
은폐하고자 했던 출산의
고통에 대해서도 나혜석은
솔직했다:
“아픈데
앞아, 참 아파요 진정, 과연 아픈데 푹 쑤신다
할까 씨리씨리하다 할까, 따딱걸린다 할까, 쿡쿡짚는다 할까, 따끔따끔꼬집는다 할까 (…)”. 그런데 “현모” 이상에 대한 반대와
함께 나혜석이 “아이 중심주의”를 주장하고, 아이가 어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아이에게 봉사해야 한다, 아이의 독립적인 “영토”를 허락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음 (“아해는 가정의
북두성”, - <동명>, 1922년9월) – 아이 인격 존중
–
개인주의적 신념을 아이에게까지
적용했음.
모성애에
대한 나혜석의 고뇌: “幾百萬人 女性이 幾千年前 옛날부터 子息을 나하 길넛다. 이와 동시에 本能的으로 盲目的으로 內體와 靈魂을 무조건으로 자식을 위하야 밧처 왓나이다. 이는 여성으로써 날 때붓허 가지고 나온 한 道德이엇고 한 義務이엇고 이보다 이상되는 天職이 업섯나이다. 그럼으로 戀人의 사랑, 친구의 사랑은 相對的이오 報酬的이나 어머니가 子息을 사랑하는 것만은 絶對的이오 無報酬的이오 犧牲的이외다. 그리하야 最高尊貴한 거슨 母性愛가 되고 마럿사외다. 만흔 여성은 자기가 가진 이 母性愛로 인하야 얼마나 滿足을 늣겻스며 행복스러웟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母性愛에 얽매여 하고 십흔 거슬 하지 못하고 悲慘한 運命속에서 울고 잇는 여성도 不少하외다. 그러면 이 母性愛는 여성에게 최고 행복인 동시에 최고 불행한 거시 되고 마럿습니다. 여자가 自己個性을 잇고 살 때 모든 生活保障을 남자에게 밧을 때 무한이 편하엿고 행복스러웟나이다 마는 여자도 人權을 主張하고 個性을 發揮할냐고 하며 남자만 밋고 잇지 못할 生活戰線에 나서게 된 今日에는 無限한 苦痛이오 不幸을 늣길 때도 잇는 거시외다.
나는 어느 듯 네 아희의 어머니가 되고 마럿사외다. 그러나 내가 애를 씨고 애를 배고 애를 낫코 애를 젓먹여 길느는 거슨 큰 事實이외다. 내가 母된 感想記中에 子息에 意味는 單數에 잇는 거시 아니라 複數에 잇다고 하엿사외다. 果然 하나 길느고 둘 길느는 동안 지금까지의 애인에게서나 친구에게서 맛보지 못하는 愛情을 늣기게 되엿섯나이다. 歐米漫遊하고 온 후로는 자식에게 대한 理想이 서잇게 되엿섯나이다. 아해들의 개성이 눈에 떼우고 그들의 압길을 지도할 자신이 생겻섯나이다. 그리하야 나는 그들을 길너볼냐고 얼마나 애씨고 屈服하고 謝罪하고 和解를 要求하엿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거시 無用之物이 되고 마럿구려.” (“이혼고백장”, - <삼천리>, 1934년9월) – 가부장적 사회의 주된
모순 – 모성은 여성에게
원래는 행복의 원천이지만
사회 관계상 불행이 되고
만다.
김일엽의 자서전적
연재 소설 “자각” (<동아일보>, 1926년6월19-26일) – 주인공인 구여성 “순실”은 처음에
남편에게 순종하지만 신여성을
사귀고 자신을 벌인 남편에게
대항, 시댁을 나오고
자신이 출산한 남편의 아들을
시댁에 보냄. 그
뒤에 여학교를 졸업하고
남편의 재결합 제안 거절. 아들 양육 거절한 사유
–
양육하게 되면
다시 남편과 인연 맺게 되는데, 그렇다면 “나의 인격과
자존심이 찢겨진다”, 그리고 남성에게도
육아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 “인격과 자존심”의
개인주의적 신념. 실제 자신의 아들 김태신을
친구의 가정에 맡기고 그
양육을 거부한 바 있었음.
“양처” 담론에 대한 저항
–
나혜석이 “사회 활동에
대해 방해하지 않을 것”을 김우영과의
결혼의 조건으로 내세움. (이전에도 히라츠카가
동거남 오쿠무라 히로시
奥村博史에게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동거에 들어갔음). 결혼 제도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
“결혼하면
여자는 그대로 말라 붓고
남자는 계속 사회적 훈련을
받아 성장한다” (“독립 여성의
정조론”). 나혜석다운 문제 제기의
“과격한
방법” – “여성 매춘부가
있다면 남성 매춘부도 있어야
되고 여성들이 거기에 가서
돈 주고 성욕을 해결하는
것은 성 욕망 충족 실패로
신경병 만드는 것보다 낫다” (“독립 여성의
정조론”). “신정조관” – “정조는
취미 (자유)다. 밥을 먹고 싶을 때 밥을
먹고 떡을 먹고 싶을 때 떡을
먹는 것과 똑 같은 자유다” (<삼천리>, 1935년2월). 나혜석의
“이혼고백장” – 사실상 조선 사회에서
거의 최초로 혼외정사의
자유를 주장했음. 그러나 그 뒤에는 어쩔
수 없이 이 선에서 후퇴하여
자신을 배반한 최린에게
“혼인빙자
정조유린”을 책망했음: 그것이야말로 그 당시
조선 사회의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혼외 정사” 상황의 설명이었음.
나혜석과
김일엽 둘 다 애당초에 기독교
신앙을 가졌음 (대다수
“신여성”은 기독교적
영향 하에 있었음). 불교로의 개종 – 개인적인 인연 (가령, 김일엽의 백성욱
박사와의 비극적 사랑)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불교의 “무아론” (無我論)에 이념적으로 끌렸음. “나, 너
라는 대상이 끊어진 절대적인
나, 일체 우주가 하나가
된 나를 증득하였다” (“청춘을
불사르고”, 1962). “나 이전의
큰 나, 즉 무 (無)”를 찾고 “나는 인생에
대한 모든 미련을 다 버린
사람이다,
나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다 잊었다” 라고 말하게 된
까닭? 김일엽의 독립적인, 자존심이 강한 여성적인
“나” (자아)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정상적으로” 살아 갈 수 있으려면
조선 사회는 김일엽의 말대로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세계를 창조하고
남의 생명을 간섭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사회”, 즉 개체 존중과
양성 평등의 사회가 됐어야
됐는데 그 당시로서 그렇게
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혜석을 폐인으로 만든
현실의 조선사회에서는, 김일엽으로서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입산이었다. 불교 세계에서도 물론
현실적 남녀 차별은 존재했지만
적어도 비구니승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존재”, 즉 원리원칙상
동등한 수행자로 취급을
받는 것이었다.
추천하는
참고서:
김일엽, <청춘을 불사르고>, 범우사, 1993.
김일엽,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문화사랑, 1997.
나혜석, <이혼고백서>, 오상출판사, 1999
정규웅, <나혜석 평전>, 중앙 M&B, 2003
최혜실,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생각의
나무, 2000
<매체로 본 근대 여성 풍속사, 신여성>, 한겨레신문사,
2005.
Hiroko Tomi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