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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 집에 살았습니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장혁

2004.06.14 / 한승희

문패도 등기도 전지현 이름으로 되어 있는 집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장혁이 살다 나왔다. 처음에는 월세로 사는 기분이었다가 나중에는 안방에서 뛰어다녔다고 했다.


:감독님, 이 영화가 성공할 거라고 보십니까?; 성공할 것 같지 않은 영화엔 절대 나오지 않는 질문이 지난 3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 크랭크업 기자 회견에서 나왔다. 곽재용 감독이 밝게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전지현이 나오는데.; 웃자고 한 말인데 한 사람만 웃지 못했다. 장혁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얼마 후 시내 곳곳에 <여친소>의 포스터가 휘날렸다. 전지현과 장혁이 귀엽게 웃던 티저 포스터와는 달리 메인 포스터는 초점이 나간 장혁의 옆 모습 뒤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전지현의 얼굴이 크게 잡힌 것이었다. 애초 로맨틱 코미디로 알려졌던 <여친소>가 슬픈 멜로영화로 마케팅 컨셉을 변경하면서 포스터가 바뀐 것이다. <여친소>를 보고 나면 이 포스터가 거짓말을 하나도 안 한 포스터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어쨌거나 장혁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문패 대신 흔적을 남긴다

:아직까지는 주인집에 월세 사는 기분이에요.; 지난해 9월 열린 <여친소> 제작 발표회에서 장혁이 한 말이다. <여친소>는 <엽기적인 그녀>의 곽재용 감독과 전지현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는 영화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엽기적은 그녀>의 크레딧에는 차태현 다음에 전지현이 뜨지만 이 영화의 개봉 후 뜬 사람은 전지현이었다. 전지현이라는 이름은 한반도뿐 아니라 아시아를 들었다 놓았다. 여러모로 .엽기적인 그녀 2・로 비쳐지는 <여친소>. 누가 들어오든 새 식구를 위한 자리가 그리 크지 않은 이 영화에 전지현과 같은 소속사에 적을 두고 있으며 오랫동안 오빠, 동생으로 친하게 지내온 장혁이 들어오게 됐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장혁은 결국 월세로 살다 나온 것일까? 농담이긴 하지만 곽재용 감독은 장혁을 배려하지 않았고, 관객을 끌기 위해서지만 마케팅에서도 장혁을 내세우지 않았다. :아뇨. 지금은 그 집에서 뛰어다니는 느낌이에요.; 조금 잔인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문패가 전지현이어서 섭섭하지는 않았나요?; 장혁이 반문한다. :부부가 한집에 살아요. 그런데 그 집 등기가 남편 이름으로 돼 있어요. 그러면 그 집이 남편 집일까요? 아내 집일까요? 둘 다의 집이죠? 마찬가지예요. 그런 거는 저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타고난 비유꾼인 장혁이 기자의 .문패론・을 .등기론・으로 순발력 있게 받아쳤다. 이내 장혁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이 영화는 멜로예요. 멜로영화에서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의 앙상블이 안 이뤄진 상태에서 감정을 잡아갈 수 있을까요? 이 영화는 상업 영화예요. 한 명이라도 관객을 모아야 하는데 내가 .저 기분 나빠요. 저는 왜 지현이처럼 안 해요?・라고 하면 되겠어요? 밖에서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안에서조차 .이건 지현이 영화니까 너는 그렇게 알고 있어・ 했다면 참여를 안 했겠죠. 제가 지현이 영화 하는 데 보태주겠다고 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 안에서건 밖에서건 각자 몫이 있는 거죠.;

장혁 역시 불 같은 스타덤 속에서 청춘을 보낸 배우다. 2000년에는 TJ(Team & Jang hyuk)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해 연기자 출신 가수로는 제법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시 노래하지 않았다. 1천5백 장이나 모은 DVD 타이틀 중에 자신이 남긴 영화는 단 5편이라는 사실에 분발하며 쉬지 않고 달려왔을 뿐이다. 그에게 배우는 인기가 아니라 영화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노력에 중독되다

공교롭게도 <여친소>뿐만 아니라 장혁의 최근작들은 그 자신을 빛내기보다 함께 출연한 여배우를 빛내는데 큰 힘을 실어줬다. 장나라를 스타덤에 올린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의 기태 역이나 이나영이 안심하고 망가질 수 있게 한 <영어완전정복>의 문수 역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진리를 새삼 깨우쳐줬다. 확실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장나라나 이나영에 비해 .터프가이・에서 .철없는 왕자병 환자・로 은근슬쩍 금을 넘은 장혁의 연기 낙폭에 그리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건 아니다. 하지만 전리품의 많고 적음은 이제 청춘 스타를 막 벗어나 배우로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어가는 장혁에게 첫 번째 관심 대상이 될 수 없다. 장혁의 제1 관심은 자신에 대한 대중의 주목을 계속 이어가는 것에 있다. :그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지만 관객들에게 꾸준히 하는 배우라는 신뢰를 주고 싶어요. 어느 순간 장혁이 출연하는 영화는 이런 영화일 거야가 아니라 이번에는 장혁이 어떤 영화에 나올까 그런 관심을 받고 싶어요.; 노력할 테니 지켜봐 주세요, 장혁은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장혁은 올해 스물아홉, 데뷔 8년차다. 학창 시절 육상과 기계 체조를 하다 우연히 연예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피아노를 전공하다 역시 우연히 연예계에 입문한 김선아는 지난해 활짝 핀 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몇 년 전에요, 우리 매니지먼트사에서 일 없는 사람이 혁이랑 저였거든요. 혁이는 빨래하고, 저는 설거지하고, 우리는 왜 일이 없을까 회사에 미안해 하면서 이젠 기억도 안 나는 수많은 오디션에 참가하고 그랬지요.; 정우성을 닮아 단숨에 주목받은 줄 알았던 장혁은 .제2의 정우성・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던 god의 뮤직 비디오 <어머님께>로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 긴 무명 시절을 보냈다. 소속사 싸이더스HQ의 정훈탁 대표는 :네가 (정)우성이처럼 잘생겼니? 네가 (차)태현이처럼 애드립이 좋아? 아니면 (홍)경인이처럼 연기를 잘해? 아니잖아. 노력해;라고 말했고 장혁은 이제까지 노력만 했다.

장혁은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신앙 간증이라도 할 것처럼 노력을 했다. 와이어 액션 신이 많았던 <화산고> 촬영 당시 한 컷을 120번 찍었던 일화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리허설을 60번 한 후에 본촬영에 들어갔는데 30번쯤 테이크를 가다가 카메라에 부딪혀 머리에서 피가 났는데 장혁이 우겨서 30번을 더 찍었다. <화산고> 촬영 중에 기절하기를 대여섯 번. 장혁은 병원에 가는 대신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소문만 듣고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명랑소녀 성공기> 촬영장에서 장혁의 대본을 보고 그의 노력을 믿기로 했다. 드라마 대본이라는 게 영화 시나리오 같지 않아서 그날 촬영분이 그날 책으로 제본돼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후 10시쯤 SBS 탄현스튜디오에서 장혁을 만났을 때 그의 대본은 벌써 새까만 걸레가 돼 있었다. 다른 연기자들이 전날 촬영분이 방영되자 우르르 TV 앞에 모여 낄낄대고 있을 때 장혁은 혼자 그 '걸레'를 쥐고 메모를 해가며 읽고 또 읽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성실함에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노력 그 자체에 중독됐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장혁의 생각은 달랐다. :솔직히 제가 미련하게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결과가 같은 것일지언정 보여 주지 못한 그 부분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안에 남는다고 생각해요. 계속 연기를 하는 이상 지금 다 보여 주지 못해도 언젠가는 보여 줄 수 있는 거죠.;

죽음을 연기한 스물아홉

장혁은 <여친소>로 본격적인 멜로 연기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영화에서 죽어 보기도 했다. 극중 그의 배역은 순진한 물리 교사 명우로, 영화 중반 장혁은 명우의 죽음, 다시 말해 스크린에서 사라지는 연기를 통해 여자 친구 경진(전지현)과 관객을 꺼이꺼이 울게 만들어야 했다. 영화 속에서 죽던 날이 마침 장혁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아침에는 미역국을 먹고, 촬영장에 와서는 스탭들이 마련한 케이크의 촛불까지 껐는데 다음날로 넘어가기 전 그는 죽는 연기를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장국영이나 리버 피닉스 같은 배우들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저야 그렇게 안 되겠지만 기분이 정말 묘했어요. 앞날이 굉장히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스물아홉이 되니까 뭔가 내 인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음 영화가 어떤 게 될지 아직 모르겠어요. 단, 저는 연기가 친구를 소개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잘 모르는 친구는 잘 소개할 수 없잖아요.;

<짱>(1998), <화산고>(2001), <정글쥬스>(2002), <영어완전정복>(2003)을 거치며 장혁은 사납게 힘을 줬던 눈을 풀고 귀엽고 친근한 이미지를 얻어갔다. 서서히 그는 변해갔다. 하지만 반항아건, 양아치건 한번에 친구 한 명만 소개하면 됐던 전작들에 비해 <여친소>에서는 살아 있는 명우와 죽은 명우라는 두 친구를 소개해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결과야 어찌됐건 이번에도 그는 무지하게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셈법대로 최종 편집본에서는 다 보여 주지 못한 연기가 자산처럼 그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홍콩에서 열린 월드 프리미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장혁이 주연한 <영어완전정복>이 상영됐다. 이미 두 번이나 본 영화라 다시 볼 생각은 안 했다. 진탕 웃겨주는 남자 벤 스틸러가 주연한 <폴리와 함께>에 채널을 맞추고 있는데 옆 자리에 앉은 승객이 너무 심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는 <영어완전정복>을 보며 자지러지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최대한 올렸는데도 그는 제 웃음소리가 얼마나 큰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장혁이 나오는 장면에선 의자까지 함께 흔들거렸다. 나도 채널을 돌렸다. 장혁이 나왔다. 방금 <여친소>를 보고 나서 <영어완전정복>을 보니 장혁의 연기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노력의 대가라는 게 이런 걸까?

사진 한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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